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가의 계곡 (문단 편집) == 조성 사유 == ||[[파일:22987.webp|width=100%]]||[[파일:TUTANKHAMUN_Tomb_evc3kj.webp|width=100%]]|| || [[세티 1세의 무덤]] 조성도 || [[투탕카멘의 무덤]] 조성도. 옆 세티 1세의 무덤에 비하면 확연히 초라해 보인다. || 당시 파라오와 그 친인척들은 당시에도 횡행하던 도굴꾼들 때문에 중왕국 때까지 유행하던 [[피라미드]]같이 눈에 띄기 쉬운 건축물 대신, 인적이 드문 오지의 한적한 계곡 바위 틈이나 벼랑에 자기 무덤을 조성하기로 했다. 당시 이집트의 사후관에 따르면 먼 훗날 언젠가 자신의 신체([[미라]])에서 되살아날 수 있지만, 그 전까지는 영혼도 제사로 제공되는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므로 제사를 바치는 신전에 주기적으로 오가야 했다. 이런 믿음을 고려하면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짓기로 한 것은 상당한 결단이었다. 신전은 수요나 후원을 감안하면 대도시에 만들어야 하는데, 왕가의 계곡은 이런 대도시와 한참 떨어져 있다. 즉 당시 이집트 고위층들은 자기 영혼이 이런 거리를 매번 왕복하는 고생을 각오한 셈이다. 한마디로 신체가 탈탈 털려 바닥에 [[오체분시]][* 이는 도굴꾼들이 이왕 온 김에 체내에도 있을지도 모를 귀중품들을 찾으려는 것 때문.]되거나 후환을 없앤다고 불태워질 바에야 그런 고생이 낫다는 셈. 또한 무덤 건설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노동자들은 외부 출입이 통제되는 마을에 모여살게 한 대신 아주 많은 임금을 주어 입을 막았다. 이 마을도 관광지가 되어 있으며 노동자들의 신전과 무덤들도 공개되어 관광객을 받고 있다. 이런 덕분에 이곳 파라오들의 무덤은 '''비교적 늦게''' [[도굴]]당했다. 물론 당시 고대인 관점에서는 충분히 도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한 지형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